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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서기실의 암호 - 태영호 증언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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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서기실의 암호 - 태영호 증언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태영호 (지은이) 
  • 출판사기파랑(기파랑에크리) 
  • 출판일201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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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무자비한 독재자인 게 틀림없는데, 떠들썩한 하루 동안의 환영 이벤트로 김정은의 이미지는 더 할 수 없이 미화되었다. 여론조사에서 77.5%가 김정은에게 신뢰가 간다고 답했다 한다. 과연 그럴까? 김정은은 누구이며 북한은 어떤 사회인가? 온 세계의 이목이 북한과 그 지도자 김정은에게 쏠리고 있는 지금,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가 밝히는 평양 심장부 이야기는 한국만이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에게 북한의 정확한 실상을 보여 줄 것이다.

우선 한반도 비핵화 문제. 북한 핵폐기냐, 한반도 비핵화냐 라는 용어 중 이번 남북정상 합의문은 한반도 비핵화를 택했다. 이것은 북한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것으로 결국 주한 미군을 몰아내겠다는 전략에 다름 아니다. 김정은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태공사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 김정일은 "조선반도 비핵화란 북한만이 아니라 남조선까지 포함한 전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뜻한다. 미국은 조선반도에서 핵전쟁 훈련을 계속하고 있고, 언제라도 핵무기를 끌어들일 수 있다. 오직 우리의 핵으로 미국의 핵을 몰아내고 미국으로부터 핵 불사용 담보를 받아낼 때만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김정일의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p.241~242)

- 1차 핵실험 직후 중국 외교부장 리조성과 북한 외무 차관 강석주가 나눈 다음의 대화에서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가 주한미군 철수를 의미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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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핵실험에 가장 분노한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1차 핵실험 사흘 후인 2006년 10월 12일, 중국 선양에서 외무성 1부상 강석주와 중국 외교부장 리조성(李肇星·리자오싱)이 비밀리에 만났다. 북한 외무성 회담기록문에 따르면 리조성은 강석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인민은 조선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대단히 존경하고 있다. 김일성 동지는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매우 전략적인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지금 조선 동지들은 그의 사상과 유산을 어기고 있다. 김일성 동지께서 조선반도 비핵화 사상을 제시하신 것은 조선과 같이 작은 나라가 핵 경쟁에 말려들 경우 과중한 경제적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붕괴될 수 있음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소련과 같은 큰 나라도 미국과의 과도한 군비경쟁에 말려들었다가 결국 붕괴되었다. 조선은 이번에 핵실험이라는 넘지 말아야 할 산을 넘었다. 이제라도 핵개발을 중지하고 경제건설에 전념하기 바란다. 핵개발을 중지한다면 중국은 조선에 대한 경제군사적 지원을 늘릴 것이다 핵으로는 조선의 체제를 지킬 수 없다. 경제부터 조속히 회생시켜야 한다.”
그러자 강석주는 이렇게 되받아쳤다.
“내가 지금 중국 외교부장 리조성과 담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청나라 사절 이홍장과 회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소련의 사례를 들었지만 중국 외교부장이 소련의 붕괴 원인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다. 소련이 붕괴된 것은 미국과의 군비경쟁 때문이 아니다. 당이 인민에 대한 사상교양사업을 게을리 했고 당 자체가 부패하고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우리처럼 당을 강화하고 사상 사업을 중시했다면 아무리 많은 군비를 쏟아 부었다고 하더라도 붕괴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또한 김일성 수령님의 탁월하고 위대한 조선반도 비핵화 사상을 언급했다. 조선반도 비핵화란 우리만의 비핵화가 아니라 남조선까지 포함한 전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뜻한다. 미국은 조선반도에서 핵전쟁 훈련을 계속하고 있고, 언제라도 핵무기를 끌어들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반도는 결코 비핵화되지 않는다. 오직 우리의 핵으로 미국의 핵을 몰아내고 미국으로부터 핵 불사용 담보를 받아낼 때만이 가능하다. 수령님의 조선반도 비핵화 사상이 실현될 수 있도록 중국이 조선과 미국의 관계를 중재해 주기 바란다.”
강석주가 사용한 이 논리는 이후 북한의 일관된 핵 논리이기도 하다. (p.24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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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3대의 핵 집착

-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했고, 그 방식이 핵과 ICBM, 공포정치였다. 신격화는커녕 지도자로서의 정통성과 명분마저 부족한 김정은이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그리고 공포정치다. 이것으로 카리스마를 형성하고 신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면 체제는 물론 김정은 자체가 무너진다. 김정은이 그토록 핵과 ICBM에 집착하고 장성택 숙청으로 대표되는 공포정치를 휘두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518)

- 핵은 체제 보장을 위해 90년대에 갑자기 개발된 것이 아니다. 6. 25 와중에 피란민의 핵 공포를 확인하고 이때부터 김일성은 핵개발을 시작했다. 50년대에 이미 원자폭탄 개발 핵 연구소를 설립했고, 70년대 중반 이후 조선반도 비핵지대화(핵무기 개발 전략)를 주장하며, 핵 불사용 정책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북한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에 불과했다. (p.40~48)

태영호의 간절한 바램

- 2016년 12월 나는 한국에서 공식 활동을 시작하면서 통일부 출입 기자단과 회견을 가졌다. 이때 나는 북한의 핵개발 완성 계획을 공개하고 이를 ‘핵 질주 계획’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2017년에 감행한 북한의 핵실험과 ICBM 발사는 나로서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2018년은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평화적 환경조성의 시기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전후해 북한이 적극적인 화해 제스처를 보인 것은 이런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이 다른 것은 몰라도 핵 문제만큼은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절감했으면 좋겠다. (p.404~405)

철도 건설 문제. 이번 판문점 선언에는 철도 건설도 포함되어 있다. 6.15 공동 성명 이후 두 번째다. 그러나 태공사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그것이 공허한 선언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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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은 6·15 공동선언 직후 러시아와도 협력의 제스처를 취했다. 2000년 7월 19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1박 2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구소련을 포함해 러시아의 지도자로서는 사상 최초의 방북이었다. 김정일은 이듬해 7월 26일부터 8월 18일까지 러시아를 답방했다.
김정일과 푸틴은 평양과 모스크바에서 각각 「조러 모스크바 선언」을 발표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 러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한다는 부분이었다. 남북 경제협력에 이어 한반도 종단철도가 연결된다면 북한에 엄청난 경제적 혜택이 들어올 것이 확실했다. 김정일도 이 계획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러시아 답방 1년 만인 2002년 8월 러시아 극동 지역을 다시 방문해 조러 모스크바 선언의 이행 문제를 협상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떠먹여 줘도 못 먹는’ 북한 체제의 한계 때문에 한반도 종단철도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러시아는 건설 의지가 확실했고, 한국은 언제라도 지원할 의사가 있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국 철도를 연결하는 수송로를 열고 컨테이너나 석탄과 같은 중량 화물을 수송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철도를 어느 정도 직선화하고 터널과 교량도 많이 건설할 계획이었다.
문제는 북한의 동해안 방어부대 대부분이 철도를 따라 배치돼 있다는 점이었다. 한반도 종단철도가 건설되어 철도 현대화가 진행되면 대대적인 부대 이전이 불가피했다. 북한 군부는 6·25전쟁에서 전세가 역전된 원인을 인천상륙작전 때문이라고 보고 수십 년에 걸쳐 동해안 철도를 따라 방대한 해안방어선을 구축했다. 철도 현대화 사업이 벌어지면 해안방어선을 다시 구축해야 한다.
북한 군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스스로 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부대 이전을 자체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개성 공단 건설 때도 군부는 새로운 주둔지를 마련하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했다. 군부는 당연히 한반도 종단철도 건설과 부대 이전을 반대했다.
부대 이전만 해결해 주면 되는 문제였지만 북한은 그렇게 할 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김정일이 군부의 반대를 물리치지 못한 이유다. 동해안 철도 현대화 계획은 자연히 힘을 잃었다. 이후 북한은 러시아의 하산부터 함경북도 나진항까지의 철도만 현대화하기로 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한국과 러시아는 아직도 한반도 종단철도 수송로 창설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구글 어스를 통해 확인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북한의 동해안 철도 주변에는 크고 작은 비행장이 수없이 많다. 지금도 북한은 한반도 종단철도 건설이 가능한 것처럼 한국과 러시아에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물론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한국이나 러시아가 북한 동해안에 무수히 산재한 부대 이전 비용까지 부담한다면 말이다. (p.14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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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남측 대통령 특사는 ‘배려, 리더십, 여유, 숙성된 고민, 솔직하고 대담’ 등으로 평가했고, 4월 정상회담 뒤 언론과 온라인에서는 ‘뚱뚱하고 귀엽다’ ‘솔직하고 담백하다’ ‘알고 보니 좋은 사람이다’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 ‘소탈하게 잘 웃는다’는 찬양 일색의 인물평이 나왔다. 고모부를 대공 기관총으로 처형했다는 뉴스는 까맣게 잊고 있다.
그럼 김정은의 진짜 모습은?

- 김정은은 성격이 대단히 급하고 즉흥적이며 거칠다.
7월 27일은 휴전협정일이지만 북한에서는 전승절로 기념하고 있다. 2013년 7월 재개관을 앞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전쟁기념관)에 화재가 발생했다. 보고를 받은 김정은이 부리나케 달려와 아직도 물바다인 지하에 구둣발로 들어갔다. 수백 명이 진화와 정리 작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김정은은 “내가 그렇게 불조심하라고 했는데 주의 안 하고 무엇을 했느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쌍욕을 했다. (p.518)

- 2015년 5월 김정은은 자라양식공장을 ‘현지지도’했다. 공장 현황이 말이 아니었다. 새끼 자라가 거의 죽었다. 공장 지배인은 전기와 사료 부족을 이유로 들었으나 김정은은 “전기, 사료, 설비 문제 때문에 생산을 정상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넋두리”라고 심하게 질책했다. 김정은을 수행하던 고위 간부들도 고개를 떨군 채 그의 지시를 받아쓰기에만 급급했다. 돌아오는 차에 오르면서 김정은은 지배인 처형을 지시했고 그 즉시 총살이 이뤄졌다. (p.519)

- 트럼프의 발언 직후인 5월 18일, 북한을 방문 중이던 영국 APTN 통신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양형섭 부위원장과 인터뷰를 했다. 트럼프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APTN 특파원의 질문에 양형섭은 “우리는 대화 자체는 반대하지 않는다. 대화는 전쟁 때도 한다. 대화 못할 이유는 없다”고 했다. 외무성이 사전에 작성해 준 원고대로 ‘우리는 언제나 대화에 임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다.
APTN은 당일 평양발 보도로 북한이 트럼프의 대화제기를 환영했다고 보도했다. 집무실에서 세계 주요 언론 채널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김정은이 이 뉴스를 접했다. 그는 야밤에 외무성 김계관 1부상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질책했다.
“야, 그 늙은이(양형섭)가 어떻게 내 승인도 없이 트럼프와 대화에 임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를 대표해서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줬는가. 나는 조선의 지도자이고 트럼프는 대통령도 안 된 후보인데 같은 급이 아니다. 외무성이 그 늙은이한테 그리 말하라고 써줬는가.”
양형섭은 1925년 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일성의 사촌 매부다. 그런 인물을 김정은은 ‘늙은이’라고 칭했다. (p.519~520)

우리가 몰랐던 평양 비하인드

- 태공사의 증언에는 대다수 북한전문가들도 알지 못했던 무수한 고급 정보들이 등장한다.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이유
―김정은은 아이 때부터 고모부에게 뿌리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는 정철·정은 형제 중의 하나가 후계자가 되지 않으면 결국 온 가족이 숙청당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김일성 생전에 자신의 아이들을 인사시키고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이것을 누가 막았겠는가. 김경희와 장성택이었다. 김정일 생전에 김경희와 장성택이 고영희의 존재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p.326~327)
- 고영희의 남겨진 사진에는 김일성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김정은 또한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는 손자 신세가 된 것에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김일성과 찍은 사진 한 장만 있었다면 스스로 ‘백두혈통’이라고 백 번 외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아마도 아이 때부터 장성택을 미워했으며, 장성택 부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p.327)
- (김정은은) 모든 재력을 핵과 미사일 개발에 쏟아야 하는데 북한의 경제적 이권 대부분은 장성택이 쥐고 있었다. 장성택은 이권을 넘기느냐, 계속 쥐고 있느냐 선택해야 했다. 김정은이 가차 없이 처형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장성택이 경제적 이권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p.312)

‘3층 서기실’
- 우리는 수많은 대북전문가와 북한 관련 서적이 있었음에도 ‘3층 서기실’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지난 3월 5일 북한에 파견된 한국 대통령 특별사절단이 김정은 집무실과 ‘3층 서기실’이 있는 노동당 3층 청사에서 김정은과 만남으로써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3층 서기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북한 언론도 처음으로 이 청사를 ‘조선노동당 본관’이라고 소개했다. '3층 서기실'은 북한 주민들도 잘 모르는 조직으로, 북한이 공개적으로 이 조직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3층 서기실은 기본적으로 김정일·김정은 부자를 신격화하고 세습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다.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가 주민들이 김씨 부자의 실체를 알게 되면 3층 서기실은 와해된다. (p.312)

- 3층 규모 당중앙 청사로, 한국으로 치면 청와대와 같다. 그리고 ‘3층 서기실’은 대통령 비서실에 가깝다. 이곳은 중앙당 일꾼들도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는 완전한 금지구역으로 김정은 부자를 신격화하고 세습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다. (p.233)

개성공단
- 김정은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우리는 개성공단이 북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돈’을 공급하는 공급처이며, 북한 주민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_ “개성공단이 조선 체제에 장기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겠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다. 하지만 얻은 게 더 많다. 우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돈을 벌었다. 둘째, 개성 시민에 대한 자연스러운 통제와 관리가 용이해졌다. 다른 지역은 장마당 때문에 주민 통제가 얼마나 힘들어졌나. 개성 시민 5만 명이 매일 한 곳에 모여 일하고 퇴근하는데 따로 무슨 관리가 필요한가. 총체적으로 우리가 훨씬 이익이다. 이런 경제특구를 내륙으로 확대해야 한다. 개성공단 같은 곳을 14개 더 만들라.” (p.299)

김일성은 사망하기 전 1990년대에 이미 식물 수령이었다
_ 1991년 교황의 방북 문제를 다루던 외무성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교황의 조선 방문은 이미 김정일 지도자 동지께서 안 된다고 결론을 내신 문제다. 김일성 수령님께서 해보라 하시니 어쩔 수 없이 자리만 지키는 것이다." 모든 권한이 김정일에게 넘어간 이후였기 때문에 김일성이 지시한 교황 방문이 이뤄질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p.21~22)
모든 것을 김정일에게 먼저 보고해야 한다는 다음과 같은 말, 즉 "이번 사업에 대한 수령님(김일성)과 지도자 동지(김정일)의 관심이 얼마나 큰 지 잘 알 것이다. ... 지도자 동지보다 수령님에게 먼저 보고가 올라가면 큰일 난다. 외무성이 모든 사안을 지도자 동지에게 우선 보고하고 그 후 지도자 동지가 수령님에게 보고하는 것이 당 내부의 보고 질서다." 라는 당 간부의 말도 김일성의 허수아비론을 밑받침한다. (p.32~33)

김정일은 김대중을 "어리석다"고 평가했다
- "페르손(요란 페르손 Goran Persson 스웨덴 총리)이 오늘 나(김정일)에게 서울 답방문제를 꺼낸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아직도 내가 서울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참 어리석다." (p.181)

이스라엘과의 미사일 극비 협상
- "우리 미사일 기술에 관심이 많은 나라가 있다. 우리가 미사일 기술을 중동에 수출하게 되면 새로운 미사일 경쟁이 일어날 것이고, 이스라엘의 안전도 위협당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10억 달러를 주면 미사일 기술을 수출하지 않겠다." (p.132~133)

북한이 화폐개혁에서 얻은 교훈
- 주민 집단 저항으로 시행 한 달 만에 실패했다. 당 경제정책비서 박남기가 처형되었다. 생존권을 건드리면 정권이 흔들린다는 교훈을 얻었다. (p.283)

- 여하튼 정책이 실패하면 담당 관료가 처형당하는, 어처구니없고 무서운 체제이다.

평양 공연을 거부한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 김정일로부터 에릭 클랩튼 평양 공연을 추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에릭 클랩튼에 대한 김정일의 집착은 매우 집요했다. 한참 만에 돌아온 답변은 '북한의 인권상황 때문에 당장은 평양에 갈 수 없으나 앞으로 사태를 좀 관망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릭 클랩튼은 평양에 오겠다는 확답을 끝내 주지 않았다. (p.253~255)

- 김정은에게 90도 인사를 한 조용필과 비교된다.

북한의 봉수교회와 신자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 한국의 종교인들이 북한을 방문하면 당연히 북한의 종교계 인사가 그들 종교 시설에 안내하여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그런데 가짜 교회에서 가짜 신자가 반복해서 예배를 보다 보니 그들 가운데 진짜 신앙심이 생기는 현상이 나타났다. (p.527~530)


평양심장부를 이해하려면 알아야 할 핵심인물들

김정남이 김일성 눈 밖에 난 이유
- 스웨덴 총리가 평양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일 2001년 5월 1일 김정남이 위조여권을 들고 일본에 입국하려다 발각됐다. 서방 국가 수장 가운데 북한을 방문한 인물은 페르손이 최초였다. 김정남의 밀입국으로 잔치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이 사건으로 김정남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p.278)

김영철은 이런 사람
- 북핵 위기가 고조되던 2014년 8월 영국 채널4가 북핵 문제를 다룬 드라마 '오퍼짓 넘버'(Opposite Number)를 제작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영철 국방위원회 정책총국장은 평양 주재 영국대사를 소환했다. 영국 정부가 반북 드라마 제작을 중지하지 않으면 영국 내에서 상상할 수 없는 보복행위가 일어날 것이고 그 책임은 영국 총리가 져야 할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전달했다. 말하자면 채널4 청사를 폭파하겠다는 것이다. (p.362)

- 지난 4월 2일 평양 공연장에서 현장 취재를 하지 못한 남측 기자단이 항의하자 기자단에게 “내가 남측서 천안함 폭침 주범이라는 사람입니다”라고 눙치며 나왔던 인물이 바로 김영철이다.

평양심장부를 이해하는 핵심키워드

벼랑 끝 외교
- 북한 외교가 강한 이유는 '벼랑 끝 외교'란 표현이 상징하듯이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외교이기 때문에 절박하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외교와 안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다. (p.69)
- 김정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국과 미국을 어떻게 저리 잘 다룰 수 있을까. 9. 19 공동성명이 나오는 과정까지 배짱은 배짱대로 튕기면서 챙길 것은 다 챙겼다. 미국의 대북 정책이 더욱 강경해질 것으로 예상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p.236)

- 북한에 우호적인 남측 인사들은 언제나 북한이 생존의 절박함에 쫒겨 불가피하게 극단으로 치닫는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교활하고 정교한 전략에서 나온 외교라는 것.

저팔계식 외교
- 김정일의 저팔계 외교 원칙은 중국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처럼 솔직한 척, 어리석은 척, 억울한 척, 미련한 척을 하면서 어딜 가나 얻어먹을 것을 다 챙기는 외교다. (p.65)

시간 끌기 기만극
- 한국과 미국이 약속한 경제적 보상의 핵심은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전력공업성 전문가들은 '외무성이 합의를 잘못했다'며 반발했다. '변전소는 무슨 돈으로 짓나. 합의문에 그런 내용이 없다.'라는 게 그들의 항의 이유였다. 그러자 외무성은 '시간을 벌기 위해 사기를 치고 있으니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대응했다. (p.54~55)
- 미국의 압박은 9. 19 공동성명이 나온 이후에도 계속됐지만 영국을 통해 미국의 행보를 예측한 북한은 있는 대로 배짱을 부렸다. 2006년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BDA문제에 대한 공세를 더욱 확대했다. 북한은 6자회담도 불참하겠다고 선언했다. 급기야 이해 7월5일 대포동 2호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고, 같은 해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김정일의 시간 끌기 기만극이 또 다시 성공해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성큼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p.237)

- 김대중 정부 때의 우리 정부의 결정적 실책이다.

인권에서도 시간 끌기 작전
- "내가 페르손 총리에게 유럽연합과의 인권 대화를 약속했다. 물론 절대 허용할 수 없다. 그렇다고 대화도 하지 않으면 유럽이 기승을 부릴 수 있다. 유럽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미국 강경보수파를 눌러놓을 수 있다. 그러니 유럽을 얼려(속여) 넘기는 대책을 연구해야 한다."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강석주는 "예비접촉과 인권 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류를 주장하면서 인권 대화의 진전을 지연시키겠습니다. 이렇게 몇 년간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p.177)

태영호의 메시지, 북한 주민을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길은 통일 뿐

- 태영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북한은 신과 같은 존재인 지도자와, 그에게 노예처럼 봉사하는 인민으로 이뤄진 사회라는 것이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에 대한 신격화 작업을 벌이면서 자신을 ‘모르는 것이 없고 모든 일에 통달한 지도자’로 부각시켰다. 수평적인 토의나 협의를 없애고 수직적인 사업 체계만 남겨두었다. 3층 서기실을 통해 모든 정보를 독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횡적 체계는 거의 없고 종적 체계만 있는) 이러한 구조가 김정일을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든다. 부서 실무자들도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 김정일이 구체적으로 꼭꼭 집어서 지시를 내리면 ‘장군님이 어떻게 이런 부분까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실은 김정일이 이미 다른 부서로부터 해당 사안에 대해 보고를 받은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김정은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3층 서기실이 실세 중의 실세인 것은 이런 시스템을 지탱하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p.235)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내세운 선군정치는 군사독재를 넘어 노예사회와 같은 체계를 수립했다. 사람의 목숨이 노예주인 김정일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좌우되었다. (중략) 노예란 남의 소유물로 되어 부림을 당하는 사람, 모든 권리와 생산수단을 빼앗기고 물건처럼 사고 팔리는 사람이다, 북한 주민에게는 인간의 기본 권리인 의사표시의 자유, 이동의 자유, 생산수단을 보유할 자유, 자기 자식을 자기가 관할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다. 단언컨대 오늘의 북한은 현대판 노예사회다. (p.515~516)

―북한은 나라 전체가 오직 김정은 가문만을 위해 존재하는 노예제 국가다.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은 북한 주민을 노예사회에서 해방시키는 ‘노예해방 혁명’이다. 북한 주민에게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권리를 되찾아주는 것이 통일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체제와 이념을 하나로 통일하고 민족 문화와 동질성을 융합하는 것은 그 이후의 가치다.
- 노예 상태인 북한 주민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미국의 남북전쟁처럼 물리적인 방법을 쓸 수는 없지만 한반도의 노예해방의 싸움은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통일의 주체를 북한 주민으로 보아야 한다. 북한 주민은 자체로 일어날 힘과 의식이 있고 이미 엄청난 정보가 북한으로 들어가고 있다. 북한 내부의 변화는 이미 진행형이다. 그 변화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속도로 올 것인지가 문제일 뿐이다. (p.534)

두고 온 북한 주민에 대한 애정

- 태영호의 사명은 단 한 가지다. “이제 나의 길은 오직 하나, 통일”이다. 그는 북한 주민에게 부채의식과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 《3층 서기실의 암호》는 태영호의 통일의 대한 신념과 북한 주민에 대한 애정의 산물이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의 소산이기도 하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내 발로 평양에 찾아가고 싶다. 친구들과 친척들, 나를 혈육처럼 돌봐준 외무성의 선후배 동료들을 만나고 싶다.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 그들을 두고 나만 대한민국에 와 있는 현실이 한스럽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그들에게 죄를 지었다.
친척의 아이들도 눈에 밟힌다. 서울에서 버스를 한 대 빌려 아이들을 모두 태워 데려오고 싶다. 이들을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시킨다면 친척들에 대한 내 마음의 짐도 만분의 일이나마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에필로그 p.542)


§ 부록―책 속으로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만경대구역에 하루가 다르게 조성되는 축전 거리를 보면서 나는 사회주의 조국에 내 뜨거운 젊음을 바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리한 축전 준비의 후유증으로 북한 경제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는 것을, 그 부담이 동구권 붕괴와 맞물려 ‘고난의 행군’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때는 모르고 있었다. (p.18)

이 무렵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었다. 외교관 월급도 몇 달씩 밀릴 때다. 김흥림 대사는 “조국이 이처럼 어려운데 조국에 손만 내밀 수 없다. 우리가 자체로 ‘외화벌이’를 하여 대사관을 운영하고 시설도 보수하자”고 나섰다. 스웨덴 전문가였던 그는 평양에 있을 때 나의 직속 상사이기도 했다. 외무성 국장을 할 때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성품이 아니었다. 불가능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김흥림 대사는 담뱃값이 비싼 스웨덴의 실정에 착안했다. 발트해 주변 국가에서 눅은(싼) 담배를 밀수해 스웨덴 밀수조직에 넘기기로 했다. (p.89)

북한은 해외 주재 외교관의 의료비를 국가가 부담해 주지 않는다. 입원비와 수술비는 자비 부담이다. 그러므로 해외발령을 받기 전에 건강검진을 대단히 깐깐히 한다. 병이 있거나 건강이 좋지 못하면 해외에 나가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해외에 나가야 돈을 좀 벌 수 있으므로 외교관들은 건강이 나빠도 병이 없는 것으로 문건을 위조한다. (p.114)

외교관이 자녀와 함께 해외로 나가려면 복잡하고 치밀한 간부사업(인사검증)을 거쳐야 한다. 우선 자녀를 데리고 나가야 할 이유서를 작성해 외무성 1국 재외대표부 지도과에 제출한다. 함께 제출해야 하는 문건도 있다. 자녀의 학업성적을 보증하는 문건, 소년단 혹은 청년동맹과 같은 정치조직에서 그의 사상 상태를 보증하는 추천서, 신체검사표 등이다. 원칙적으로 동반 출국이 안 되는 자녀를 데리고 나가기 위해 멀쩡한 아이를 환자로 만들기도 한다. (p.221)

김정일 사망 후 북한은 김정은 체제로 빠르게 진입했다. 우선 1호 행사 경호규정부터 달라졌다. 1호 행사란 최고지도자가 참가하는 행사를 일컫는다. 이전에는 당위원회가 참가자 명단을 행사 며칠 전에 호위사령부에 제출하고, 행사 당일에는 사복을 입은 보위원과 경호원이 참가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군복 차림의 경호원이 신분증을 확인했다. 김일성광장 입구 양쪽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었고, 그 옆으로 완전무장한 군인이 도열했다. (p.297)

‘5과 대상’은 북한에서 널리 알려진 용어다. ‘5과’는 조선시대로 치면 대궐에서 일하는 궁녀 조직이라고 보면 된다. ‘궁녀’를 뽑는 기능도 있으며 중앙당 조직지도부로부터 도당(道黨), 시당(市黨)까지 전국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
각 5과가 뽑는 대상은 14~16세 사이의 여학생이다. 질병검사, 서류심사, 면접 등을 통해 까다롭게 선발한다. (p.331)

전시 상황에서는 터널 전술이 여러모로 유효하다. 하지만 북한의 경제적 수준이나 에너지 사정으로는 터널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정전이 되면 환풍기가 돌아가지 않아 통신장비 등 주요 시설에 녹이 슬었고 병사들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준전시 상태가 선포되거나 한국과 미국이 합동군사연습을 하게 되면 인민군 대부분이 터널 생활을 해야 한다. 그 부담과 고통이 대단히 크다. (p.406)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을 어떤 목적에 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변명을 붙여도 평양에 두고 온 자식은 해외에서 근무하는 외교관에게 ‘인질’일 수밖에 없다. 나는 현학봉 대사에게 “7월이면 맏이의 학기가 끝나는데 그때까지만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평양에 나의 제기 사항이 올라갔고 며칠 후 무조건 7월 중에는 들여보내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왔다. 평양의 재촉은 이후에도 반복됐다. 7월이 다가오면서 맏이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아내의 말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는 결심했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살 권리도 없는가. 이렇게는 더는 살지 말자. 이게 무슨 사람의 삶이냐.’ (p.506)

성격은 다르지만 북한 체제와 김정은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는 또 있다. 종교다. 김정은이 아무리 신적인 존재가 된다한들 진짜 신을 믿는 독실한 신자 앞에서는 한갓 나약한 사람일 뿐이다. 물론 현재 북한 주민의 신앙과 종교 활동은 대단히 미약하다. 그러나 북한에도 신앙인과 종교 활동이 있다는 것만큼은 잊지 말아야 한다. (p.526)

§ 북한의 핵개발 일지
1953. 3 소련과 원자력 평화적 이용 협정 체결
1956 물리학자 30여 명 소련 루블리나 합동원자핵연구소 파견
1962 영변 원자력 연구소 완공
1963. 6 소련으로부터 소형 원자로(IRT-2000) 도입
1963. 10.28 노동신문, 북핵 용인 않는 소련 비난하는 사설 게재
1964. 10.16 중국, 핵실험 성공으로 핵 보유국
1975. 4.18 베이징에서 김일성-마오쩌둥(毛澤東) 회담, "북한은 핵무기 꿈꾸지 마라"
1980 일본 사회당과 조선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1985 조선반도 비핵화 평화지대화
1985. 12. 핵확산금지조약(NPT) 서명
1989. 6 중국 천안문 사태
1989. 11.9 베를린 장벽 붕괴
1990. 9 한?소 외교관계 수립
1990. 10 통일 독일 출범
1990. 10 1차 남북 고위급 회담
1991. 2 미국 걸프전 승리 후 최대 외교안보과제로 핵확산 방지 설정
1991. 5.27 북한, 유엔 동시가입 의사 표명
1991. 7 북한, 가입신청서 제출
1991. 7.30 남북 한반도 비핵화 방안 발표
1991. 9 유엔 안보리 만장일치로 남북 동시가입 채택
1991. 9.28 미국, 전 세계 전술핵무기 철수 발표
1991. 12.13 남북기본합의서
1991. 12.25 소련 해체 선언.
1991. 12.31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문(남북공동발표문) 발표. 김일성의 '조선반도 비핵화' 1단계 완성
1992. 1 한미 팀스피리트 합동훈련 중지 선언
북한은 IAEA와 핵안전조치협정을 체결하고 사찰단 방북을 허용. 그러나 남북 상호 사찰은 거부했다.
1992. 1 김용순 방미, 아놀드 켄터(Arnold Kanter) 미 국무차관과 회담. 미군 철수 요구 않는대신 조미(朝美) 수교를 요구했으나 불발
1992. 5 북한, 핵물질과 시설에 관한 '최초 보고서' IAEA에 제출. 김정일의 사기극 드러나
1992. 8 한중 수교
1992. 9 이탈리아와 1억 달러 차관 협상
1993. 한미 팀스피리트 재개 선언
1993.3. 북한, NPT 탈퇴로 1차 북핵 위기
1993. 7 제네바 북미 고위급 회담. 갈루치(Robert Gallucci) 단장, "사찰 수용 않으면 전쟁"이라는 말로 위협. 이후 영변 핵시설 타격설이 나돌아 군사위기 고조
1994. 6 김일성-카터 전 미국 대통령 회담.
대북제재 중단 대가로 남북정상회담 등 합의
1994. 7.8 김일성 사망
1994. 8 황해도 홍수로 인한 식량부족 심화로 국제기구대표단 방북 허용
1994. 10 제네바 조미 기본합의문(제네바 핵합의) 채택으로 1차 북핵 위기 봉합
1995. 1 영국, 북한과 비밀접촉 희망
1995. 3.21 제네바 영국대사관에서 접촉
2000. 1 북 이탈리아 수교
2000. 6.13 남북 정상회담
2000. 6.15 6 15 남북공동선언
2000. 7.19 러시아 푸틴 평양 방문
2000. 7.26~8.18 김정일 러시아 답장. 조러 모스크바 선언. 철도건설 등
2000. 10 서울 3차 아셈정상회의. 김대중 정부 유럽 각국에 북한과의 수교 요청
2000. 12.12 북영(北英) 수교
2001 미국 부시 행정부 출범
2001. 6.13 브뤼셀에서 북한과 유럽연합, 인권 예비접촉
2001. 9.11 9?11 테러
2001. 10 미국 아프가니스탄 침공
2001. 12 영국, 평양에 대사관 개설
2002. 1 부시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 규정
2002. 8 김정일 방러 모스크바 선언 이행 문제 협상
2002. 10.3~5 미 제임스 켈리(James Kelly) 국무부 차관보 방북
2002. 10.16 고농축우라늄 개발 시인. 2차 북핵 위기 시작
2003. 2 IAEA, 북한을 유엔안보리에 회부. 북핵 위기 원점으로
2003. 3 미국 이라크 공격
유엔 인권위 대북인권촉구결의안 채택. 북한 '무시전략' 시작
2003. 4 미?북?중 3자회담
2003. 4.30 영국에 북한대사관 개설
2005. 2.10 북 핵무기 보유 선언
2005. 9.16 미 방코델타아시아(BDA) 우려대상 지정
2005. 9.19 4차 6자회담 9?19 공동성명 채택. 북한 체재 보장 핵개발 포기
2006. 6자회담 불참 선언
2006. 10.9 1차 핵실험 실시
2006. 10.12 북중 비밀회담. 강석주-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 회담
2006. 12 5차 6자회담 2단계 회의
2007. 2.13 5차 6자회담 3단계 회의 2?13 합의 도출
2007. 10.3 6차 6자회담 2단계회의 10?3 합의 9?19 구체 이행 위한
2009. 4.15 김일성 생일에 '대장동지'(김정은) 등장
2009. 4 헌법개정
2009. 5 2차 핵실험
2009. 11 화폐개혁
2010. 3 천안함 폭침
2010. 9 후계자 공식 확정
2010. 11.23 연평도 포격
2011. 12.19 김정일 사망 발표(12.17 사망)
2012. 4.11 김정은 노동당 1비서 추대
2012. 4.14 최고인민회의 핵보유국임을 헌법에 명시
2012. 12.12 은하3호 발사 궤도 올리는데 성공
2013. 2.12 3차 핵실험
2013. 3.31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핵 경제 병진노선 공식 결정
2014. 3 유엔인권위 북한인권조사보고서 발표
2016. 5 노동당 7차 대회
2016. 9. 5차 핵실험
2017. 5 문재인 정권 출범
2018. 4. 27 판문점 선언

목차

머리말 -- 10
프롤로그 -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 14

1장 | 핵으로 가는 길
김일성, “교황을 평양에 초청하라” -- 18
남북 유엔 동시가입 막전막후 -- 24
주중 이탈리아 대사의 방북에 들뜬 김씨 부자 -- 29
모택동, 김일성에게 “조선은 핵무기 꿈도 꾸지 말라” -- 40
제네바 핵합의는 시간 끌기 기만극 -- 52
북한 농촌 현실 보고 외국대표단 ‘경악’ -- 55
영국의 비밀접촉 제의에 김정일 흥분 -- 57
실세 리수용은 왜 힘이 센가 -- 61
김정일의 저팔계식 실용외교 -- 64
“동무들은 나처럼 살지 마시오” -- 66
북한외교가 강해 보이는 이유 -- 69
김용순을 제친 강석주 -- 71
잘 나가던 장인 숙청, 내 앞길에도 암운 -- 79
강명도 탈북이 열어준 나의 첫 해외 발령 -- 84

2장 | 고난의 행군 외교
북한외교관 담배 밀수 사진, 세계에 공개돼 -- 88
노르웨이에서 위조여권으로 체포된 장성택 -- 93
식량원조 받으러 동분서주, 덴마크 지원 약속에 눈물 -- 98
황장엽 탈북, “남조선 납치” 주장하다 “비겁한 자여”로 돌변 -- 103
스위스에 북한 우표 120톤 팔고, 덴마크에 또 팔았다가 -- 105
덴마크TV서 본 영화 <태백산맥>, 한국 와서 임권택 감독 만나 -- 108
북한을 뒤흔든 ‘심화조 사건’, 숙청 주도자도 처형 당해 -- 110
병원도 못 가는 외교관들, 친구 김춘국 대사의 죽음 -- 113
독일이 건넨 동독 유학생 명단, 보위부가 간첩단으로 조작 -- 115
치즈 원조 받으면서 “싣고 갈 배도 제공해 달라” -- 117
김정일, “태영호가 원하는 것 다 해주라” -- 118
‘김대중 선생’의 대통령 당선, 환영과 당혹 사이 -- 128
이스라엘과 스웨덴서 미사일 극비 협상 -- 131
연평해전 후 남북 외교관 사우나서 조우, ‘멀뚱’ -- 136
남북정상회담, 김정일 덕분이라고 주재국에 선전 -- 139
귀국선물로 양초가 인기, 극심한 전력난 때문 -- 142

3장 | 한국이 살린 북한
장성택 도움으로 복귀한 장인 -- 145
6·15 선언 후 활기 찾은 평양 -- 147
석 달간 해외생활 샅샅이 조사받고 북유럽과장 부임 -- 149
북송 장기수들, 한국서 번 돈 당에 바치고 때늦은 후회 -- 151
김대중 정부, 유럽국가들에 북한과 수교 요청 -- 155
“굴욕 감수해도 빨리 수교하라, 미 부시 정부 들어서기 전에” -- 162
수교 거부한 프랑스, 북한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 165
런던 대영박물관 한국관서 북한 미술 전시회 열어 -- 169
스웨덴 총리, 김정일 면전서 북한 인권 지적 -- 172
북한 최초의 인권 ‘접촉’, ‘대화’나 ‘회담’은 안 돼 -- 181
이라크전쟁에 떠는 김정일, “런던에 대사관 열어라” -- 185
임신한 평양 주재 영국외교관 부인에게 ‘기적’을 선물 -- 192
영국월드컵 8강 <천리마 축구단> 영화 제작 비화 -- 196
서방 언론사 첫 평양지국 개설 추진 -- 200
김정일, 고이즈미 강공에 일본인 납치 직접 사과 -- 208
영국 비행사 유족에게는 짐승 뼈 보내 망신 -- 212
유럽에 내다판 북한 돈의 역류, 재정상 처형 -- 214
룡천역 폭발사건 후 금지된 휴대폰, 리수용 건의로 재개 -- 218

4장 | 영국 통해 미국 견제
해외 발령 때마다 아이 데려가기 전쟁 -- 221
실세 리용호가 영국대사로 간 까닭은 -- 225
“남조선 괴뢰에게 골프를 배운다고?” 김정일의 격노 -- 228
‘모르는 게 없는 지도자’ 만들어내는 ‘3층 서기실’ -- 233
나도 감탄한 김정일의 핵전략 “배짱 튕기면서 다 챙겨” -- 236
영국학교의 아들 담임, “너희 나라가 잘못한 거야” -- 243
백승주 의원이 준 한국 손톱깎이와 10년 -- 249
북한 핵외교의 한 축 “영국 통해 미국을 견제하라” -- 252
에릭 클랩튼, “북한 인권 때문에 평양 공연 어렵다” -- 253

5장 |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1차 핵실험 후 “외교관 자녀 한 명 빼고 모두 귀국시켜라” -- 256
실권 쥔 제1부상, 하루 종일 김정일 전화 대기해야 -- 263
갑자기 내려오지 않는 김정일 결재, 알고 보니 뇌졸중 -- 269
후계자 김정은 ‘대장동지’ 이름으로 부상 -- 277
김정은 등장 직후 화폐개혁으로 후계 공고화 시도 -- 280
연평도 포격으로 날아간 벨기에 주재 북한대사관 개설 -- 284
영국과 관계 개선 위해 런던 장애인올림픽 참가 -- 288
김정일 사망, 김정은 지시로 이틀 후 발표 -- 294
김정은 집권 초 “개성공단 14곳 만들라”, 개혁조짐 보여 -- 297
외무성 대변인 맡겠다는 사람 없어, 문서로만 언론 발표 -- 304
모란봉악단 미국노래 연주, 리설주 등장, 개방 시동인가 -- 306
금세 돌아온 공포정치, 인민군 총참모장 처형 -- 307
‘내부의 적’ 경고로 장성택 처형 암시 -- 309

6장 | 망명 전야
다시 영국으로, 맏이와 생이별에 눈물바다 -- 315
김정은 공포정치엔 ‘어머니 콤플렉스’도 한몫 -- 317
장성택 처형을 런던서 인터넷판 <노동신문> 보고 알아 -- 319
숙청을 부른 또 다른 사연들 -- 322
어릴 때부터 고모부에 원한 쌓여 -- 326
장성택 측근 1만여 명 쑥대밭 숙청 -- 332
외무성 성원이 숙청을 피하는 법 -- 339
영국공산당의 북한 세습 비판에 곤혹, “논쟁에 말려들지 말라” -- 343
나를 ‘혁명의 배신자’라고 한 영국인 허드슨의 ‘순정’ -- 349
장애인청소년 예술단 영국 공연 추진 -- 352
김영철 정찰총국장, 영국 대리대사 불러 테러 협박 -- 360
김정은 헤어스타일 조롱한 미용실 찾아가 테러 위협 -- 365
김정은과 로드맨의 ‘위험한 만남’, 주선자는 베일 속 -- 367
BBC 한국어 방송 극력 저지 중 기자 3명 억류 -- 373
3층 서기실이 보낸 암호 -- 375
“김정은 원수님이 태영호 동지를 구체적으로 요해하셨다” -- 381
김정철과의 61시간 -- 385
김정철과 함께 부른 <마이 웨이>, 그의 눈엔 이슬이 -- 389
지방 소도시에서 원하던 기타 사고는 꼭 껴안아 -- 394
‘방북 불가’ 로이터 기자 신원보장해 주고 입국시켜 -- 400
2018년을 핵 보유 위한 평화환경 조성 시기로 설정 -- 402
영국서 바라본 북한은 숙청과 처형의 나라, 수치와 분노 일어 -- 405

7장 | 소년 유학생
소년 유학생으로 선발되다 -- 416
대사관 직원 가족으로 위장해 중국 유학 -- 419
중국 학생들 모택동 비판에 충격 받아 -- 421
김일성과 기념사진을 찍다 -- 424
모택동 격하운동에 “나쁜 물 든다”며 북한 소환령 -- 428
5·18광주민주화운동 일어나자 “이제 통일 되겠구나” -- 430
‘곁가지’ 치기 시작, 김성애 시계 사건 -- 432
국제관계대학에서 배운 상대를 제압하는 협상기술 -- 433
대학 2학년 때 야간돌격대 자원해 노동당 입당 -- 436
유학 시절, 박정희 동경하는 중국 학생들을 보며 -- 439
집단생활하는 북한 유학생들, 경멸과 호기심 대상 -- 442
<동물농장> 영화 보며 북한 현실 오버랩 -- 445
유학생 숙청으로 이어진 김일성대학 독서회사건 -- 446

8장 | 명천 태서방
명천의 태서방 집안, 빈농에서 토지개혁으로 기반 마련 -- 450
당위원회 지시를 따라야 하나, 치안대에 가입해야 하나 -- 454
황곡리 시골에도 농지 협동화 바람 -- 460
1960년대엔 농촌 형편이 평양 못지않아, 이후 지방 가면 ‘나락’ -- 463
6·25 때 이모할머니 가족 월남 사실 드러나 아버지 좌천 -- 467
만경대를 ‘망경대’로 잘못 쓴 수학천재의 영락 -- 472
김일성 사진으로 딱지 만든 친구 가족의 불행 -- 477
“영어 잘해야 잘 살 수 있다” 당 간부 아이들 외국어학교로 -- 481
평양외국어대학 출신 탈북자 많아 -- 486
핵심 빨치산 출신 가문에 장가를 가다 -- 492

9장 | 노예 해방을 위하여
“이순신이 누구예요?” -- 499
이렇게는 못살겠다 -- 504
김정일 시대 봉건사회로 퇴행을 거듭 -- 509
단언컨대 북한은 현대판 노예사회다 -- 513
김정은, 거칠고 즉흥적이나 똑똑하고 논리적이기도 -- 516
북한 체제가 견디기 어려운 까닭 -- 521
북한 주민이 진짜 신을 믿는다면 -- 526
김영남의 눈물과 김여정의 미소 -- 530
통일은 노예해방혁명이다 -- 533
에필로그 - 만인의총 앞에 서서 -- 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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